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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자 Ⅱ 운영자 2018-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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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령한 자 Ⅱ

 

고린도 교회가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으나, 도덕적, 영적 문제 또한 많은 교회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께서는 자신이 개척하고 세웠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이해가 정확하였을 것이다.

어떤 한편의 시각으로 볼 때, 고린도 교회는 신령한 성도 즉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가 부족함으로 인해 교회 문제들이 터져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은 어떠한가? 영적으로 성숙하고 신령한 성도들이 충분하게 있는가?

안타깝게도 신령한 성도의 삶이 무엇인지, 특징이 무엇인지도 모를 뿐 아니라, 신령한 성도로 성장하는 데에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성경에 대한 영적 지식과 원리에대한 무지때문일 것이다.

 

이전에 필자가 영적전쟁과 내적 치유 부분을 다르면서 언급했듯이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연관된 영적 세계와 원리들을 제시하고 설명해주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단순히 이성적으로만 봐서는 안 되고,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영적인 원리를 이해하는 영적 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면 신령한 성도는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

먼저 신령한 성도들의 특징을 설명하기 전에 필자의 인간 이해는 '삼분설(三分說)'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이다. 성경적 관점에 대한 인간 이해에 대해 신학적으로 인간을 영(spirit)과 혼(soul)을 하나로 보고, 육(body 또는 flesh)을 따로 보는 이분설과 인간을 영, 혼, 육 세 부분으로 이해하는 삼분설이 있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데살로니가전서 5:23)

 

이러한 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볼 때, 우리의 영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직관, 영교, 양심이다.

신령한 성도는 직관이 발달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영적인 교제가 잘 되는 사람이며, 양심의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영의 기능에 대한 지식을 알고, 우리의 영을 잘 계발하면 우리는 신령한 자 즉 영적인 성도로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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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1. 직관(intuition)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로마서 8:5-9)

 

우리가 성경에 볼 수 있듯이 ‘영의 생각’이 있다.

우리의 혼이 생각을 하듯이 영도 생각을 한다. 직관이란 영의 생각과 같은 것으로,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내 영이 받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 영이 성령님께서 주시는 것을 직접적으로 아는 것”이다.

 

우리의 영의 생각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과 평안’을 경험할 수 있다. 영적인 관점으로 볼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혼이 우리의 영과 함께 협력하여 우리의 지체인 몸을 순종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을 기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로마서 8장에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육신의 생각(혼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오히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직관을 계발 시켜야 한다. 직관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각과 감동을 받아야 한다. 성령님을 따라가야 한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감동과 생각을 우리의 직관이 받아야 한다.

 

직관이 발달하면 자연스럽게 ‘분별력’이 생긴다. 이 분별은 영적인 분별력으로, 성령님께 알게 하시는 것을 통해서 알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반대로 표현하면, 분별력이 없는 이유는 직관이 발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관이 무디다는 말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둔감하다는 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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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

 

2. 영교(Communion)

 

영교는 영적인 교제로써,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창세기 3장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에 아담과 대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탄이었던 뱀과도 대화를 한다. 아담의 타락 이전에 인간은 하나님과 영으로 자유롭게 대화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세기 3:8-10)

 

구약에서는 주로 제사법과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했다고 한다면,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하나님과 영적인 예배를 통해서 교제하게 되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 할지니라”(요한복음 4:23-24)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영과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으로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영적인 예배의 모형은 성전의 구조와도 흡사하다.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은 같은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눈다. 그것은 성전마당, 성소, 지성소이다.

 

성전마당은 우리의 육체와도 같다. 우리의 육신이 제물이 되어 번제단과 물두멍에서 정결하게 된 후에 우리는 성전에 들어가 진설병(말씀), 등대(성령의 조명)을 대할 수 있다. 이는 혼적인 영역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영광을 볼 수 있는 장소는 바로 지성소이다. 지성소는 우리의 영의 부분이다. 우리는 영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의 예배가 혼인 생각과 감정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이 말씀을 통해 직관으로 깨달고 은혜를 받는 예배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과 진리의 예배인 것이다.

예배는 너무나 중요한 영적인 교제의 통로이다. 예배의 형식에 집중하기보다는 우리가 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도록 더욱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기도는 영적인 교제의 중요한 수단이다.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교제하므로 우리의 영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을 계속적으로 경험해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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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xels

 

3. 양심(Conscience)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브리서 9:13-14)

 

예수 그리스도의 정결한 보혈은 우리의 양심을 새롭게 하신다. 이 양심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순결하게 섬길 수 있다.

우리가 영적인 사람으로 자라갈수록 우리의 양심으로 더욱 정결하고 순수하게 되어 하나님과 사람 앞에 거리낌이 없게 된다. 이 거리낌 없는 양심을 우리 스스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도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나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나이다”(사도행전 24:14-16)

 

사도 바울은 대제사장 아나니아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어 고발된 자리에서 고백한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믿는 믿음이 유대인들 앞에서도, 떳떳하게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강조하신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며, 예배 가운데 나아가서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깊이하면 할수록 양심을 더욱 새로워진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의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동기에 대하여 그 진정성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지를 계속적으로 점검하게 해준다.

마치 양심은 우리의 영적인 신호등과 같다.

하나님의 법에 떠나면 빨간불이 켜져서 경고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초록색 불이 켜지는 우리 삶의 온전한 신호등 불과도 같은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신령한 성도는 우리의 영의 기능인 직관, 교제, 양심이 활성화된 사람으로 하나님과의 깊고 친밀한 교제가 살아있는 성도이며, 영적 분별력이 탁월한 성도이며, 선한 양심으로 행동하는 성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자신의 서신서를 읽는 성도들에게 젖으로 먹는 수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시면서, 이러한 사람이 장성한 자라고 하는데, 이 장성한 자가 바로 신령한 자인 것이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히브리서 5:11-14)

 

바라기는 독자 제위들의 신앙이 젖을 먹는 수준에서 벗어나,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영적인 지각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것과 사람의 것들을 예리하게 분별하는 성도들로 자라가기를 소망한다. 더 나아가 뉴질랜드에 있는 모든 한인 교회 안에 영적으로 성숙한 신령한 성도들이 넘치기를 기도한다.

 

 

출저 : http://www.onechurch.nz/pastorshins_pastoring/14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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